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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소설/쾌청.

쾌청 4화.

by Vㅏ코드 2025. 7. 22.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을 기다리던 겨울은 계절에 맞는 시간이었다.

들짐승들이 추위를 피해 숨고 봄을 안배함에 겨울잠을 자듯, 집에서 서로를 할퀴는 칼바람에 나는 도서관으로 피신했다.

진학 예정인 고등학교는 방학에도 도서관을 열고 있었고 입학 예정생은 물론 졸업생까지도, 아니 사실 방학과 학교가 끝난 방과 후 시간부터는 동네 주민들까지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방학이기도 하고 밖도 쌀쌀해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문을 열자 따뜻한 난방이 빨간 귀를 녹여주었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서인지 내부는 상당히 넓었고 배치도 다양했다.

사서 선생님이 계신 데스크 맞은편으론 앉을 수 있는 넓고 긴 테이블들이 있었고 그 뒤로는 책장들이 도미노처럼 나열돼 있었다.

저 자리는 한 번도 앉지 않았다.

 

즐거운 방황을 끝내고 책을 고르면 다시 데스크 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문의 맞은 편인 이곳은 성벽처럼 가려주는 책장과 창가 아래 띄엄띄엄 있는 소파들.

한 두 명 정도만 앉을 수 있는 탁자. 내가 좋아하는 자리다.

 

대부분은 소파에 누워 책을 읽다 잠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가끔 탁자에도 앉았다.

나는 창밖에서 내리는 눈을 배경 삼아 책을 읽고 있었다.

 

"오늘은 무슨 책이야?"

연희쌤이 컵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나와 마주 보고 앉았다.

 

오늘은 따뜻한 코코아였다.

고등학교 사서를 맡고 있는 연희쌤은 내가 탁자에 앉으면 가끔씩 소소한 대화를 나누거나 조용히 책을 읽었다.

 

"감사합니다. 그냥 소설책이요."

나는 컵을 들고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 후후 불었다. 

 

종이로 된 컵은 날씨를 감안해도 매우 뜨거웠지만 컵홀더가 덧씌워져 적당히 따듯하게 느껴졌다.

부드러운 목 넘김과 초콜릿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연희쌤은 말을 걸 때 꼭 먹을 걸 주었다.

다정한 목소리와 귀여운 인상 때문에 그런지 같이 있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물론 눈 내리는 날 코코아를 준다는 점이 제일 컸다.

 

"어, 하루키 작가네?"

연희쌤은 내가 내려놓은 책의 표지에 얼굴을 들이밀고 제목을 더듬더듬 읽었다.

반묶음 머리가 코코아 같은 색깔이었다.

 

"안경 흘러내려요."

 

"아! 고마워."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 안경 안불편하세요? 가벼운 걸로 바꾸는 게 좋아 보이는데."

연희쌤의 얼굴에 비해 큰 검은 뿔테 안경은 각도에 따라 쉽게 제자리를 이탈했다.

 

"히히, 난 이게 좋아."

애처럼 웃는 연희쌤은 세운 두 손 끝으로 안경 양 끝을 밀어 올렸다.

 

"이거 같이 먹어."

그리곤 붉은 리본으로 포장된 쿠키를 가운데 놓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분주히 움직였다.

 

처음에는 이 사람도 불편했다.

누구든 처음 보는 사람은 경계하는 게 당연하니까.

하지만 오븐에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듯 연희쌤도 그렇게 다가왔다.

 

"자주 오시네요. 여기 재학생이신가 봐요."

처음엔 정중한 태도로 물으며 사탕을 건네어왔다.

딱 봐도 어려 보이는 나에게 존댓말을 해주는 게 진짜 어른이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사탕을 받고 고래를 까딱 움직여 멋쩍게 감사를 전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많이 춥지 않나요?"

다른 날엔 데스크에 앉아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네."

떨떠름했지만 무시하기도 좀 그랬다.

 

"집이 가까우신가 봐요."

또 다른 날엔 책장에 꽃을 꽂으며 물었다.

그렇게 천천히, 빠르지 않게 다가왔다.

 

"피곤해 보여요. 이거 먹고 힘내요."

탁자에서 책을 들고 꾸벅이던 내 앞에 사탕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나는 멍하니 사탕을 보다 연희쌤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봄에 여기로 입학하거든요."

아마 타이밍이 적절했던 것 같다.

유독 지치는 날.

걸음걸이 하나가 천근만근으로 무거운 그런 날.

아무렇지 않게 던진 따뜻한 한 마디에 마음이 열렸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름이 뭐야?"

 

"나승우예요."

 

"난 이연희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연희쌤은 손을 뻗었다.

어른들의 인사법은 낯설어 그 손을 물끄러미 보다 어색하게 잡았다.

본지 꽤 되기도 했고 말도 먼저 걸어 놓고는 처음 보는 것처럼 만나서 반갑다는 말이 왜인지 좋았다.

사람 관계라는 게 어쩌면 이름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걸 지도 모르겠다.

 

"무슨 생각해?"

또 멍하니 쿠키 속에 빠져 드는 내 정신을 연희쌤이 건져 올렸다.

 

"그냥 옛날 생각이요."

쿠키 하나를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집어먹고 다시 책을 집었다.

 

"아니 근데 하루키 작가 너무 글을 잘 쓰지 않아? 나도 예전에 그 책 읽었었는데 첫 문장부터 대박이었지. 완벽한 문장은 없다. 완벽한 절망이 없는 것처럼... 꺄아악 어떻게 첫 작품부터 그런 글을 쓸 수 있지?"

친해진 연희쌤은 첫인상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환상이 깨졌다고나 할까, 물론 멋대로 가진 이상한 환상이었을지 모르지만.

 

분명 조용하고 친절한, 사서가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 같았는데 사실은 병적인 책 덕후였다.

책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잔잔한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변했다.

도서관이라 큰 소린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정말 책을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람이 무언가를 이렇게 까지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하하... 또 흥분했네."

관심사를 막 쏟아내다가 과열된 엔진을 식히는 것처럼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재밌었으니까."

연희쌤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짧은 책을 반도 읽지 못했지만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혹시 일기도 쓰니?"

 

"아니요 왜요?"

 

"아니 책 좋아하는 애들이 많이들 쓰길래 너도 쓰나 해서. 승우는 뭔가 글 쓰면 잘 쓸 것 같아."

 

"글쎄요 국어시간에 깨있던 적이 많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헐 너 의외로 불량하구나?"

연희쌤은 나에게 민철이 다음으로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폐관시간이 가까이 오면 나는 연희쌤을 도와 도서관을 정리하고 집으로 향했다.

처음엔 극구 사양하던 쌤도 이젠 가벼운 일을 시킬 정도로 익숙해진 모양이다.

정리를 마치고 인사를 한 뒤 정문을 나오자마자 다시 도서관이 그리워졌지만 이젠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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