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헤어진 민철은 중학생을 지나 고등학생이 돼서도 만나지 못했다.
가끔씩 부모님에게 민철이에 대해 물으면 정말 모르는 건지 말해주고 싶지 않은 건지 얼버무리기 바빴다.
그 이후의 추억은 별로 없다. 기억이 별로 없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낮도 많이 가리고 말주변도 부족해 친구 사귀기가 인생사에서 가장 어려웠다.
그럴수록 민철이의 빈자리가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학교에선 거의 잠을 잤다.
꿈에선 종종 민철이가 찾아오기도 했다.
아니 이것도 변명인가?
그렇다기 보단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당신이 똑바로 했어야지!"
"아니 그게 다 내 탓이야?!"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왔다.
언제부터였을까.
엄마와 아빠가 서로에게 소리를 치는 날이 많아졌다.
소리를 높이고 열을 높이고 기이어 손가락을 높이면 그에 비례해 나는 작아졌다.
유일한 친구도 사라지고 집안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이 오고 가는 사이를 걸으려 하면 자꾸 발에 치여 넘어졌다.
그게 반복되자 나는 걷는 법을 잃었다.
넷이던 가족이 셋으로 줄자 소음은 사라졌다.
잠잠해진 집이 반가웠다.
그래서 엄마에게 해맑게 다가가자 다시 넘어졌다.
치인게 아니다.
차였다.
우리 집은 잠잠해진 게 아니라 아무 소리도 허용받지 못한 거였다.
엄마가 먼저 잠들기를 기다렸다.
숨소리가 커지는 걸 확인하고 천천히 속으로 백을 새고 일어났다.
원래는 아빠랑 엄마랑 내가 함께 잠들던 침대를 며칠 전부터 나와 엄마만 써서 탈출이 어렵지 않았다.
나는 꼭 부모님과 함께 잤다.
아빠와 엄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낑겨 잠이 드는 걸 좋아했다.
그냥 어렸을 땐 그랬다는 거다.
화장실 거울로 얼굴을 확인했다.
뺨이 부어있었다.
다행히 빨간색이었다.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면 딱딱한 복숭아를 찌르는 것 같은 감촉과 함께 옅은 통증이 느껴졌다.
펑!
기다리던 신호가 들리자 가슴이 들떴다.
아빠방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빽빽하던 책장과 옷장은 텅텅 비고 바닥은 온갖 종이들로 어질러져 있었다.
늘 아빠가 열중하던 책상뒤로 환한 노란색이 비쳐왔다.
나는 의자를 밝고 올라 소리가 나지 않도록 느리게 창문을 열었다.
"우와..."
나도 모르게 흘러나와 다급하게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벌렁벌렁 뛰는 심장이 잠잠해질 때까지 방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멀리 있는 대학교에서 불꽃놀이 축제가 한창이었다.
노란 궤적이 밤하늘을 가르며 올라갔다.
하늘 끝에 다다라서 형형색색의 불꽃들이 연달아 피어났다.
붉은색, 푸른색, 초록색.
색도 모양도 다르지만 하나같이 눈부시게 빛났다.
이쁘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엄마가 깨지 않게 조심히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방은 캄캄했지만 아직도 눈앞에 폭죽이 터지는 모습이 생생했다.
이불을 말아 쥐고 얼굴까지 덮어 올렸다.
약속대로는 안 됐지만 이렇게라도 봐서 다행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잊어버리지 않도록 계속해서 불꽃을 떠올렸다.
다음날 아침밥을 다 먹고 등교준비를 할 때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굻었다.
엄마가 눈높이를 맞추고 손을 뻗어오자 흠칫 놀라 움찔거렸다.
어쩌지 또 화내시겠다.
눈을 질끈 감고 온몸에 힘을 바짝 주었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따듯했다.
슬며시 눈을 뜨자 엄마가 나를 안아주고 있었다.
"...괜찮아?"
입이 몇 번 뻐끔거리다 물었다.
무슨 뜻으로 물었는지는 모르겠다.
엄마는 답하지 않고 잠깐동안 나를 안아주다 내 두 팔을 살포시 잡고 내 얼굴을 바라보다 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가벼워진 팔을 매만졌다.
엄마가 출근하고 나와 할아버지만 남았다.
할아버지는 나를 불러 앉혔다.
편한 자세로 앉았다가 버릇없다고 혼내시면서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하셨다.
"너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내가 뭔 죄를 지었길래 이 꼴을 보고 살아야 하는지. 당체 이해할 수가 없어 염병할 것들."
할아버지는 붉은 눈시울로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 발 뒤꿈치가 저려오느라 바빴고 튀겨오는 침 때문도 있었다.
그러다 화를 다 내셨는지 눈가를 손으로 쓸으셨다.
호통을 치실 땐 땅만 보면 됐는데 조용해지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봤다.
무릎 위에 얹은 내 손 위로 쭈글쭈글한 가죽이 닿았다.
"죽어라 공부해.'
'다른 애들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 얕잡아 보여."
"누가 널 때리면 맞고만 있지 말고 똑같이 때려."
"잘 살아야 해. 그게 복수하는 거야."
나의 작은 머리를 열심히 굴려도 그 말들이 이해가지 않았다.
아빠는 남들한테 친절하라고 했다.
베푼 친절은 돌아오는 거라고.
엄마는 당한걸 그대로 돌려주는 건 똑같은 사람이 되는 짓이라 했다.
복수라니, 누구한테 무슨 복수를 한다는 걸까.
"배운 대로 행동해. 모르면 가만히 있어. 아는 게 많아야 무시받지 않아."
표독한 말들이 무슨 뜻인지 몰라 그냥 착한 아이로 남아있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촉촉한 눈으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아까 엄마가 안아줬을 땐 그래도 좋았는데 할아버지는 너무 힘을 많이 줘서인지 불편했다.
혼자가 된 학교생활은 혹독했다.
방파제가 사라진 나를 거칠고 난폭한 파도들이 덮쳐오기 시작했다.
민철이에게 두들겨 맞던 태민이 나를 집요하게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