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재미가 없었다.
수업은 지루하고 졸렸지만 잠을 자진 않았다.
쉬는 시간이 되면 태민이를 피해 어딘가로 숨었다가 수업시간이면 다시 와야 했기 때문이다.
허공만 바라보다 수업이 끝났고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집에 가봐야 이 시간엔 아무도 없었고 할 것도 없었다.
친구가 없는 나에게 도서관은 최적의 장소였다.
이곳에선 태민이를 포함해 누구도 나를 건들 수 없었다.
신성불가침의 책들 사이를 자유롭게 누볐다.
도서관은 넓어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할 때까지 돌아다닐 수 있었다.
여기선 조용히 하고 뛰지만 않으면 됐다.
그건 너무 쉬웠다.
제목들만 훑어도 벌서 재밌었다.
그렇게 책을 고르고, 읽고, 소파에 누워 잠들기를 반복하다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에 와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집은 나름 안정적이게 변하고 있었지만 진짜 문제는 사교성을 잃어버린 나였다.
반을 배정받고 맨 끝 창가자리에 앉았다.
바람이 기분좋게 들어오는 인기 있는 자리였지만 나는 늘 혼자였다.
말을 건다는 선택지는 나에게 없었고 옆에서 말을 걸어와도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었다.
민철이랑은 몇시간이고 얘기했었는데, 지금은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느 날이었다.
쿵!
발에 걸려 넘어졌다.
땅을 짚은 내 모습을 비웃는 건 낯익은 얼굴이었다.
퉁퉁한 배와 기름진 턱살, 진한 눈매를 한 까까머리 남자애.
대현이었다.
나는 그렇게 계단을 밟듯 인생의 두 번째 파도를 맞닥뜨렸다.
소문의 다음 단계는 폭력이었다.
초등학교 때 태민이와 함께 나를 괴롭히던 한대현.
태민이가 민철이를 두들겨 팰 때 옆에서 벌벌 떨던 그 퉁퉁이가,
민철이가 사라진 것을 확신하자 저팔계 같은 얼굴로 다시 이빨을 드러냈다.
복도를 지나가면서 일부로 내 어깨를 부딪혔다.
비실한 나는 낙엽처럼 밀려났다.
원래도 나보다 컸지만 거기서 머리 하나는 더 커진 대현의 괴롭힘은 계속됐다.
수업시간에는 등 뒤로 지우개똥이나 종이 쪼가리를 던졌고 잠을 자고 있으면 책상을 발로 차고 놀란 나를 보며 웃었다.
하교하는 나를 끌고 하교 뒤편에서 걷어찰 때는 민철이가 보고 싶었다.
나로는 저 형태를 띤 악의를 무찌를 수 없었다.
나는 겁쟁이 었다.
사라지는 교과서와 쓰레기통에 처박힌 필통이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선생님께 말하진 않았다.
괴롭힘을 당하는 게 부모님 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백배 나았다.
나 때문에 또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고 치지 않고 무탈하게, 착한 아이처럼.
무언가 조금씩 금이갔다.
아마 주머니에 구멍이 나서일 것이다.
한 발짝 한 발짝.
떨어지고 떨어지고.
끊기고 부서진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오늘은 저번에 그렸던 나무판에 칼로 깎을 거야. 칼을 미는 방향에 손이 있지 않도록 하고 조심해서 하고 있으렴 교무실에 잠깐 다녀올게."
미술선생님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교실을 나갔다.
미술시간은 좋아했다.
동적인 활동이 많아 오로지 집중할 수 있었다.
활동들이 재밌기도 했고.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의 작품에 집중하고 있었다.
끙끙 앓는 애도 있었고 거침없이 판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깎아내는 애도 있었다.
나는 놀이터를 만들고 있었다.
소중한 우리의 아지트.
매달리던 구름다리, 날아갈 듯 밀던 그네, 아늑하던 미끄럼틀.
추억의 조각들이 짝을 맞춰 한 폭의 그림이 돼 가고 있었다.
그때 대현 내 팔꿈치를 툭 밀쳤다.
손이 밀려 판을 잡고 있던 내 왼손에 조각칼이 박혔다.
비명도 나지 않았다.
시선도 손에 가지 않았다.
그저 판화.
나의 옛 아리움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뚝.
근육다발과 함께 끊어지는 소리가 머리 안에 울렸다.
어쭙잖게 표정을 하는 애들 사이에서 낄낄대는 대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 웃음소리가 칠판을 긁는 소리처럼 귀에 꽂혔다.
다른 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초라하고 나약한 나는 맞설 수 없었다.
그건 민철이라 가능했던 거다.
나는 착한 아이여야 한다.
문득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나는 민철이가 되기로 했다.
푹!
"으아아아악!"
손에서 뽑은 조각칼로 대현의 허벅지를 찔렀다.
비명은 대현이의 것인지 기겁하며 물러나는 아이들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리를 붙잡고 울먹이는 거만한 머리가 앉아있던 내 눈앞까지 내려왔다.
"넌 항상 그 아가리가 문제야."
판화를 집어 대현의 머리를 후려쳤다.
대현이는 휘청거리며 뒤에 있던 책상에 기대는가 싶더니 다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좋은 높이였다.
뺨을 후려치는 것처럼 판화를 휘둘렀다.
핏방울과 나무 조각이 날렸다.
쓰러진 대현의 위에 올라탔다.
신음 소리를 내며 팔로 얼굴을 막는 대현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얘 좀 말려봐!"
우리를 둘러싼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다들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구경꾼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언제나처럼.
빠직.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대현의 팔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드디어 그 얼굴이 드러났다.
대현의 동공이 떨고 있었다.
"내, 내가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한 번만 봐줘 제발."
두려움으로 가득 찬 대현을 보자 피부가 오소소 올라왔다.
내 팔도 덩달아 떨렸다.
나무판이 이렇게 무거웠었나.
학교에서 배운 도덕과 할아버지의 말이 내 안에서 충돌했다.
이성은 배운 것들에서 정답을 정하지 못했다.
가쁜 숨을 뱉으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리운 이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민철아.
:"넌 뭐가 그렇게 다 쉽냐."
난 이것도 이렇게 무거운데.
마지막으로 판을 들어 올렸다.
힘이 부쳐 양손으로 잡았다.
공중에서 판이 후들후들거렸다.
나는 민철이다.
나는 민철이다.
나는...
"...나는 민철이다."
작게, 아주 작게 읊조렸다.
"아아아아!"
쾅!
미술선생님이 몸을 날려 나를 밀쳐냈다.
책상에 처박힌 나는 혀를 찼다.
소란이 일어나자마자 문을 열고 뛰쳐나간 반장에게 상황을 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 뒤는 가물가물하다.
노발대발할 줄 알았던 대현의 어머니는 예상외로 정상이었다.
처음엔 불같이 화를 내다 아들이 한 짓들을 들을수록 얼굴이 창백해졌고 끝내 얼굴을 들지 못하셨다.
우리 엄마는 반대 의미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간의 일들과 이번일은 양측 어머니들의 사죄와 요청으로 인해 조용히 마무리하고 사건은 일단락됐다.
돌아오는 차 안은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집에 들어간 뒤 내 몸은 따갑고 뜨거웠다.
울면서 소리치는 엄마의 말도 먹먹했다.
그 안에서 이상하게 아빠의 이름만 기억에 남았다.
그 뒤로도 나는 민철이 처럼 말하고 민철이 처럼 행동했다.
소문도 괴롭힘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민철이었다.
그러고 싶었다.
창밖은 평화로웠다.
맑은 하늘과 백색소음을 동반한 풍경은 텔레비전에서 가끔 보던 자연을 다룬 다큐 같아서 심심하지 않았다.
한 학년이 지나자 누구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가끔씩 모둠수업을 할 때나 짝을 지어야 할 때 다른 애들의 시선과 행동에 거슬릴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무덤덤해졌다.
내 말투도 냉담하고 짧게 변했고 선생님들 사이에서 나의 평판은 숫기가 없는 애에서 점점 싸가지없는 애로 변모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모두 도서관에서 보냈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간섭받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
나만의 작은 낱말의 정원.
중학교 도서관은 초등학교 때보다 작았지만 책들은 더 다양했고 하늘은 유난히 더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