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삼일이라 했던가.
삼일도 채우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집에 있으니 센서에 반응하는 전등처럼 나만 보면 할아버지는 입으로 따발총을 쐈다.
공포탄, 조명탄, 실탄.
다양하게도 쏴 재꼈다.
이러다 진짜 정신병이라도 올까 싶어 나는 다시 집 밖을 나섰다.
학교 도서관을 가기 위해 항상 언덕 아래로 내려갔으니 이번엔 올라가 보기로 했다.
회색 콘크리트 위에 알록달록한 지붕들만 눈에 선했다.
낡은 전봇대 밑에는 쓰레기 더미가 쌓여있었고 골목은 어른들의 수다소리로 번잡했다.
탁상에서 고추를 말리는 할머니들과 목이 늘어난 티를 입은 남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구경하며 정처 없이 걸었다.
카메라?
난간에 기대 연기를 뿜는 여자의 목에는 연식이 있어 보이는 디지털카메라가 걸려있었다.
요즘도 저런 카메라를 쓰는 사람이 있구나.
어깨까지 흘러내린 흰 티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그녀는 멀리서 봐도 이뻤다.
하지만 날카롭게 뻗은 생머리 사이로 비친 검은 눈동자는 여지없이 이곳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이런 날씨에 저러고 있으면 감기 걸릴 것 같은데.
그녀는 입으로 문 담배를 덜렁거리다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뭐를 그리 서둘렀는지 약간 부끄러워진 나는 괜히 굴러다니던 돌멩이에 화풀이를 했다.
정처 없는 여정은 나름대로 즐거웠다.
몇 년 동안 살았던 동네인데 위쪽은 처음 와봤다.
할아버지는 언덕 위를 싫어하셨다.
거긴 질이 안 좋다고, 조선족이나 빚쟁이들이 들어와 물을 흐린다고 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그 언저리에 사는 우리 집도 뭐가 다르냐고 묻고 싶었지만 당연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집에 계시는 시간이 규칙적이었다.
때때로 다를 때도 있지만 거의 매일을 같은 시간에 나갔다가 같은 시간쯤 돌아왔다.
매일 뭐를 그리 바삐 돌아다니시는 걸까.
그러고 집에 와서 힘들다며 짜증 낼 거면 나가시 지를 마시지.
계단을 오르는데 슬슬 다리가 무거워지고 있었다.
등 뒤로 그을린 해도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계단에 앉아 무릎을 모으고 멍하니 저무는 해를 바라봤다.
노을, 어스름, 황혼.
감성을 자극하는 자연의 연출에 많은 이름이 붙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프랑스의 속담을 좋아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
해질녘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나의 개인지 나를 사냥하려는 늑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시간을 뜻하는 말이다.
하늘은 붉은색, 주황색, 분홍색으로 물들다 금세 푸른색으로 변하더니 어두워졌다.
아름다운 시간은 참 빨리 간다.
나는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집으로 가야 했다.
계단을 내려가며 내가 가는 건지 끌려가는 건지 그런 생각을 했다.
눈이 오나 보다.
몇 날 며칠을 동네를 쏘다니던 나는 드디어 새로운 아지트를 발견했다.
언덕을 올라 위태로운 난간을 따라 꼬부라진 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오르막길 아래 파란 지붕의 집.
우연찮게 발견한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았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눈과 낙엽이 자욱한 마당에, 아직 잠을 자는 커다란 나무와 넓은 평상이 있었다.
나는 주로 그곳에 누워있었다.
책을 읽고 잠을 자고 가끔 운동을 해볼까 했지만 씻을 수가 없어 관뒀다.
이 집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된 것 같았지만 알고 보니 위쪽 동네의 절반 이상은 사람이 살지 않았다.
김 빠지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결과가 만족스러우니 되었다.
밟히면 사부작 거리는 낙엽과 갈리진 벽 사이로 눈이 쌓인 담벼락.
희미하게 사람 목소리가 섞인 백색 소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탁상에 누워 히히 웃으며 발을 젓다가 날아온 나뭇잎이 얼굴로 떨어졌다.
얼굴을 털며 일어나 마당을 보았다.
오늘은 아지트 청소나 해야겠다.
툇마루에 버려져있던 빗자루로 바닥을 쓸었다.
갈색 대나무에 뻣뻣한 나뭇가지 같은 것을 엮은 빗자루의 삭삭 소리가 정겹게 울렸다.
왜 이렇게 생긴 빗자루는 어딜 가나 있는 걸까.
낙엽과 눈을 나무 아래로 모으다 잠시 손을 멈췄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이 나무가 피운 꽃을 볼 수 있을까.
아마 자주는 못 보겠지.
학교도 가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또 바람이 불 테니까.
그래도 나는 웃으며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버려진 마당을 쓰는 내 모습이 소설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찬 바람도 뺨을 스치고 가니 나지막이 입꼬리가 살랑거렸다.
"매운 계절의 채찍의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이 고원, 아니 이 도원에 나 홀로 있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 조차 없다"
여기는 온통 나의 발자국뿐이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눈을 감고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봄이 올 그날을.
눈이 녹은 웅덩이에 내 미소가 무지개처럼 번져있었다.
덜컹.
대문이 흔들려 흠칫 놀라 눈을 떴다.
어깨를 움츠리고 문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집주인일까? 아니 근데 여기 며칠 동안 있었지만 아무도 안 왔는데?
머릿속이 혼잡해지고 귓가에 내 심장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도 없자 내 삼장박동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바람인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머리를 잠깐 긁적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빗질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