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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소설/쾌청.

쾌청 8화.

by Vㅏ코드 2025. 7. 31.

'후... 다 했다."

분위기에 취해 한껏 움직이고 나니 몸이 나른했다.

나는 평상에 위에 드러누웠다.

 

"조금만 잘까..."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기 시작한 그때.

 

깡! 까가강!

 

귀를 때리는 청아한 메아리가 들렸다.

대문을 넘자 굴러온 유리병이 발끝을 때렸다.

 

"...소주병?"

시린 겨울도 따듯하게 댑혀줄 두꺼비는 친구들에게서 낙오되어 처량하게 나를 올려다봤다.

시선을 올려 언덕 위를 따라가자 곳곳에 떨어진 다른 친구들도 보였다.

 

병들이 가득 담긴 포대.

접은 박스를 꾹꾹 눌러 묶은 꾸러미.

소음의 주범인 빈 캔들도 나뒹굴고 있었고 그 끝에는 할머니 한 분이 리어카에서 떨어진 폐지들을 힘겹게 담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동정심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귀찮기도 하고 졸리기도 해서 들어가 잠이나 자려는데 아까의 메아리보다 더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맞은편 집 앞에서 나온 아줌마 두 명이 혀를 차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가만히 서서 한 명은 팔짱을 끼고 다른 한 명은 손가락질을 했다.

그 모습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가는 사람들도 폐지를 건너며 인상을 쓰기 바빴다.

어떤 남자는 큰 소리를 치며 지나가기도 했다.

 

'저 싸가지 없는 것들이.'

이마에 핏대가 서고 이빨이 깨질 듯 맞물렸다.

 

"더럽게 시끄럽네."

깊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려 떨어진 것들을 주웠다.

언덕 중간에 떨어진 종이 박스를 먼저 모아 묶은 뒤 리어카에 떨어지지 않게 실었다.

 

"아이고 학생 더러워 만지지 마."

할머니는 쭈그려 앉아 손사래를 쳤지만 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다시 내려가 깡통들을 모아 와서 넣으니 할머니가 내 팔을 툭툭 두드렸다.

 

"이것만으로도 고마워 학생. 나머진 그냥 둬."

시린 바람에도 땀방울을 흘리는 할머니의 얼굴은 무척이나 온화했다.

 

"고마워하지 마세요."

나는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지들이 뭐라도 되는 것 마냥 유세 떠는 게 꼴 보기 싫어서 이러는 거니까."

나는 등을 돌려 내려갔다.

마지막 남은 유리병들을 포대에 넣고 리어카 끝자리에 실었다.

짐칸을 닫고 열리지 않는지 쿵쿵 두드렸다.

 

"그리고 무시하세요."

 

"응?"

 

"저것들이 하는 소리 무시하시라고요."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들의 목소리는 절대 작지 않았다.

이쯤 되면 들으라고 씨부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안 들릴 거라 생각하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남는 끈으로 윗단을 넓게 둘러 떨어지지 않게 고정했다.

이런 건 처음이라 약간 끙끙댔지만 이 정도면 얼추 된 것 같다.

 

"아유 내가 칠칠치 못해서 그렇지."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굽은 허리 때문인지 앉은 자세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하... 집이 어디세요?"

할머니를 지나쳐 손잡이 안으로 들어갔다.

말리는 손도 뿌리치고 무작정 한두 발짝 걸으니 그제서야 할머니도 못 이기는 척 옆을 나란히 걸었다.

할머니의 안내를 따라 언덕을 올랐다.

 

오늘 처음 알았다.

폐지를 줍는 것도 옮기는 것도 상당한 중노동이다.

불어오는 바람이 춥긴커녕 시원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땅에 떨구고 언덕을 다 올랐을 때 옆에 할머니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자 곧이어 할머니가 무릎을 손으로 짚으며 온덕을 올라왔다.

할머니는 숨을 거세게 내쉬면서 계속 걸으려 하셨지만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잠깐 쉬었다 가요."

 

"...그럴까?"

고요한 골목엔 할머니의 숨 고르는 소리만이 바람에 날렸다.

그것을 기다리며 나는 올라온 언덕을 돌아보았다.

 

'할머니는 평소에도 혼자 이 길을 다니는 걸까. 이 무거운 걸 끌고.'

 

"고마워 학생 조금만 더 가면 돼."

나는 할머니의 걸음에 속도를 맞췄다.

할머니는 나를 올려다보더니 흐뭇하게 웃으셨다.

 

"이름이 뭐니?"

 

"...나승우에요."

 

"집에 안 가도 돼?"

 

"네."

 

"왜?"

 

"지금 가면 더 피곤해요."

 

"음?"

뭐라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아니, 얼떨결에 그래버렸다.

 

"할아버지가 있는데 성격이 많이 괴팍하세요. 지금쯤 주방에 있을 거고 조금 있으면 티비를 보다 주무실 테니까 그때 들어가야 돼요."

 

"학생이 이렇게 착한 거 보니 할아버지를 닮았나 보네."

 

"방금까지 뭐 들으셨어요. 성격이 더럽다니까요?"

내가 가장 닮기 싫은 사람이 바로 할아버지다.

툭하면 나오는 큰소리에, 다른 사람 말은 듣지도 않는 고집불통.

솔직히 내가 지금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건 아니라 해도 도움을 주고 있는 건 사실인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원래 성정은 한 대 걸쳐서 나오는 거야. 길가에 노인을 도와주는 게 할아버지를 닮아서 그래."

 

'원래 나이가 들면 다 말이 안 통하는 걸까.'

 

"너무 미워하지 마. 이 나이쯤 되면 어린애 같아져. 마음은 한창인데 몸이 안 따라 주거든. 마음이 앞서 뭘 하려고 하면 금방 힘이 부치고, 그럼 나약한 몸뚱아리가 싫어지고. 그런데 또 주변에 도와달라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해. 그럼 혼자 투정 부리고 기대고 싶은데 괜히 짜증만 내고 그러는 거야."

 

"...미련하네요."

내 한마디에 할머니는 끌끌 웃었다.

 

"그치. 나도 그걸 깨닫는데 오래 걸렸어."

나는 입을 떼다가 할머니의 눈빛에 다시 다물었다.

 

"...너무 오래 걸렸지."

그 뒤로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할머니는 흘러간 어딘가를 보는 것 같아 말을 걸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리어카를 끌면서 바퀴가 녹슬었는지 기름칠이라도 해야겠다는 둥 이걸 팔면 얼마나 버는 걸까 하는 둥 잡생각이나 하며 걸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떠오르는 다른 생각들을 누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야. 고마워 승우야."

오는 길에 몇 번 더 할머니는 질문공세를 퍼부었지만 나는 건성으로 답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버릇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집은 다른 집들과 여간 다를 바 없었다.

금 간 담벼락과 녹슨 대문, 허름한 집과 텅 빈 마당을 채우는 큰 나무는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듯 담벼락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뻗어 나온 가지 위로 핀 눈꽃이 유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봐."

안으로 들어간 할머니는 잠시 뒤 나왔다.

그리고 내 손에 사탕 한 개를 쥐어주었다.

 

"이거 받고 종종 와서 말동무 좀 해줘."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에서도 할머니는 소녀처럼 배시시 웃었다.

 

"...이제 가야겠어요."

난 발길을 돌려 담벼락을 따라 길을 되돌아가다 삐져나온 나뭇가지 밑에서 멈췄다.

바람이 불어 눈꽃이 휘날리며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주먹이 바스락거려 펼쳐보았다.

손에는 구겨진 누룽지 사탕이 들어있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배웅하고 있었다.

선명히 떠있는 할머니의 미소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요즘 보기 힘든 사탕을 얻었더니 기분이 좋았다.

사탕을 머금고 혀로 이리저리 굴리자 구수한 단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반만 닮았어도 참 좋았을 텐데.'

겉면이 까끌까끌해서일까.

누룽지 사탕은 조금 쓰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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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독백 부분을 ' '로 구분해 봤습니다.

앞으로도 이럴지 아니면 그냥 여태처럼 갈지 고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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